성경에 보면 예수님 공생애 중에 우셨다는 기록이 세 번 나오지.
주로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을 큐어 하고 케어 하시면서 궁휼히 여기셨던 예수님이 세 번만 눈물을 흘리시었겠냐만, 기록이 그렇다는 거지.
예수님은 곧 있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올라가시고 있었지. 견고하게 세워져 있는 성, 그 성 안에는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어져 있는 성전이 있었지. 유대인들의 자랑거리였고, 자존심이었던 그 소중한 성전을 품고 있는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들어오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왜 우신 걸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그분의 말씀을 쫒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내지 못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그분의 말씀을 떠난 나라와 민족에 나타날 미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고 견고하게 서 있는 성 같지만, 앞으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져 버릴 그 성의 미래를 보고 우신 거였어.
유대민족에게 다가올 심판과 멸망의 비극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소리 내어 우셨는데, 이름은 평화의 성이지만 그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평화를 잃고 무너져 내릴 예루살렘 성곽을 바라보시며 흘리신 눈물이 예수님의 첫 번째 눈물이었지.
예수님의 이 눈물은 현실이 되었어. 눈물을 흘리신지 37년이 지난 AD 70년에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성과 그 성전을 초토화 시키고 백성들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었거든.
지금은 그곳에 그렇게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을 기념해서 '눈물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더군.
예수님이 흘리신 두 번째의 눈물.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서둘러 가실 법도 한데, 예수님은 사일이나 지나 장례식이 다 끝난 다음에 가셨어.
마르다가 동구 밖까지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으며 하는 말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는 원망의 말을 하네.
동생 마리아도 급하게 동구 밖까지 달려 나가 예수님의 발 앞에 넓죽 엎드려 언니 마르다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어.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주님에 대한 믿음의 상태가 동일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지.
예수님과 두 자매는 보통 이상의 관계였어. 봉사, 섬김의 대명사하면 '마르다'였지. 누가 뭐래도 예수님을 섬기며 봉사할 줄 알았던 그런 존재가 마르다 이었으니까. 그런가하면 동생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 발에 붓고는 여인의 인격을 상징하는 긴 머리털로 발을 닦아 내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과 희생이 남달랐던 사람이 바로 마리아 이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라비 죽음 앞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주님이 하시지 않자 그들이 보인 반응은 원망이었어. '당신이 좀 일찍 오셔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안 죽었을 텐데,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다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아픔을 겪게 하냐'는 그런 원망이었지.
마르다나 마리아가, '주님의 깊은 뜻이 있겠지. 오셨으니 뭔가 뜻을 이루시겠지' 하는, 주님을 향한 더 깊이 있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는 성숙함을 보일 수는 없었을까?
그들은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믿었고, 무엇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한 것일까? 무엇을 위해 옥합을 깨트리고, 무엇을 위해 봉사한 것일까? 결국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말이지.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원망부터 쏟아놓는 그들의 모습이, 예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무엇이 다르고, 믿지 않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냐 말이지.
그저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주님의 마음을 몰라주고, 섭리를 몰라주고, 원망부터 하고 나선 두 자매의 바르지 못한 믿음,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 앞에서 주님은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두 번째의 눈물을 흘리셨어.
예수님의 세 번째 눈물은 구세주로서의 눈물이었어.
온 세상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을 쏟아 내셨다고 했어, 죽기까지 고민스러운 슬픔을 담고 있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고 했어.
심한 통곡과 눈물을 쏟아내며 하신 간구와 소원이 무엇이었을까?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면 기꺼이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제물로 바치겠다는 구세주로서의 비장한 각오의 눈물을 아버지 앞에 쏟아 내신 걸 거야.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떠한 고통이라도 순종하며 죄악에 중독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눈물 속에 기쁨으로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죽음은 잠자는 것으로 바뀐 것이고,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면서, 내 삶에 어떠한 절망이 찾아온대도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지.
결국 주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흘리신 그 눈물로 인해서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환경과 상황이 닥친다 해도 미소 짖도록 만들어 주신거지.
하늘 보좌에서 오늘 날 우리 인간들의 작태를 내려다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실까?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면서 그리스도라 칭송하며 따라다니던 무리들이 자신들의 욕심대로 안 해준다고 돌변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무늬만 기독인들을 보시면서 어떠하실까?
아마도 심한 통곡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매년 수억 원을 들여 수많은 성도들을 모아 놓고 기도회라는 쇼를 보여주는 교단들이 있지. 소속 교회가 일 만 개가 넘고, 성도가 300만이 넘는 제일 큰 장자 교단이 된 것을 감사한다며 양각나팔을 불어대고 난리도 아니었지.
우리 주님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하시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감사한다는 것일까? 아마도 순종하라는 명령 앞에 말 잘 듣고 헌금 잘하는 성도들에게 아부하는 감사가 아니었을까 싶어.
그들의 함성 소리에 주님의 음성이 파묻혀 들릴 듯 말 듯 하더라고.
"이것들아! 너희들이 장자 교단이라고? 부정부패의 장자가 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 교회 앞에 양심을 회복해라. 타락한 교세만 자랑하지 말고 책임을 다해라. 성추행, 재정 횡령, 사기, 금권 선거 등으로 빛을 잃고 맛을 잃어버린지가 언젠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느냐!"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하지도 못하면서 성도들을 등쳐먹는 그들을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분명히 들렸어.
"구호헌금 모아가지고 자신들의 바벨탑을 쌓느라 비전센터인지 뭔지 건립에 써버리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세례교인 의무금'을 받아 납골당인가 뭔가에 수십억 원을 매몰시키고, 넘쳐나는 총회 헌금 쓸 곳이 없어 저들 소송비용을 대더니 이젠 총회회의장 경비 용역까지 물 쓰듯 쓰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명예훼손에는 눈 하나 까딱 안 하는 것들이 걸핏하면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며 선·후배, 동료 목사들을 향해 소송을 밥 먹듯이 하는 너희들을 보노라면 너희 교단은 이미 침몰하는 타이타닉호가 되었느니라."
주님이 네 번째 눈물을 흘리시면서 통 사정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았어.
"현장에서 살아가는 삶이 쉽지 않다는 거 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으로 믿음 지키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거 안다. 그러다 보니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자꾸만 원망이 들끓고 있는 거 안다. 그렇다고 그 원망 다하고 산다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 할 수 없지 않겠니? 원망이라는 단어를 왼손으로 누르고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오른손으로 들어 올려 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했지 않니. 그럴 거라고 가슴에 담고 믿음으로 기다려 봐. 절망이라는 단어를 소망이라는 단어로 바꿔 놓고 기다려 봐. 그러면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미소 짖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내가 분명히 도와줄게.
내 이름으로 헌금을 거둬 흥청망청 낭비하는 삯꾼들, 양두구육을 쓴 그들을 가까이 하지마라. 도대체 교단이란 게 무엇 하는 곳이고,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냐?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느니라."
한국 교회는 몇 몇 메가 처치의 넘쳐나는 헌금이 망쳤다는 자조 섞인 원망이 있어왔지.
그려. 그놈의 맘몬이라는 망령이 버려 놓은 겨.
주님. 울지 마셔요. 주님이 남겨 놓으신 드러나지 않은 칠 천 명의 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고 있잖아요.
2012. 09. 15. (토요일 새벽에)